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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암칼럼] 사후 배려도 동물 사랑이다

2024-08-12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다. 그리고 시작이 있어야 끝이 있다.

동물과 사람이 먹으면 싸야 하고 태어나면 죽어야 하는 대자연의 이치 가운데 아침과 저녁은 삶의 단면으로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것이다.

이를 거부하거나 역행할 때 자연의 섭리가 무너지는 것이며 그에 대한 대가는 당장은 아니더라도 때가 되면 인과응보와 결자해지의 길을 걸어야 한다.

특히 여자가 아이를 낳고 남자가 전쟁터에 나가 나라를 지키는가 하면 평소 가족들의 부양에 대해 두 어깨가 무거워져야 한다. 그러함에도 여자가 아이를 못 낳는 게 아니라 안 낳는 시대가 됐다.

여기서 적용되는 게 시작이 있어야 끝이 있다는 논리다. 동물의 번식 과정은 수컷의 구애와 암컷의 호응이 더해져 임신하고 출산하는 것이며 번식이라는 끝이 있는 것이다. 반면 2024년 대한민국은 일단 남성의 구애부터 국가가 간섭한다. 하나의 현상에 백 가지 덤터기를 씌워 쳐다만 봐도 수치심만 느끼면 범죄 요건이 형성되는데 여성이 어떤 원인을 제공하든 남성이 화를 내거나 감정 조절을 못해 화만 내도 언어폭력이라 하여 구속 여건이 조성된다.

그 원인이 여성의 외도든 경제적 요구가 강하든 무관하게 남성이 구애하는 과정부터 살벌한 단서가 붙으며 심지어 서로 마음이 통해 성관계 도중에도 중단하라면 하던 일을 멈춰야 하며 이불속까지 국가가 단속하는 세상이 됐다. 시작이 이럴진대 연애, 결혼, 임신, 출산이라는 과정의 종점인 출산이 사회적 문제라며 돈으로 때울 정책을 화려하게 펼친다.

마치 봄에 씨앗을 뿌리지 않고 가을에 추수하겠다며 막대한 예산을 들여 최고급 경운기도 구입하고 계절근로자도 불러들이고 곡식 쌓을 창고도 냉장 시설까지 추가하는 계획을 세우는 것과 같다. 이 정도면 시작이 있어야 끝이 있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최근 사람보다 동물을 더 아끼는 바람이 불고 있다. 말할 나위도 없이 어느 날 마당에 있던 개가 안방으로 자리를 옮기고 관련 분야의 성장세가 두드러지게 높은 현실을 보며 과연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다는 의미를 모두 함께 공감해 보자.

먼저 장날 재래시장에서 강아지를 사 오던 일이 언제부턴가 반려견을 입양한다는 말로 표현 자체가 달라졌다. 말끝마다 ‘우리 아기’라며 개의 이름을 불러주는데 이름 정도는 습관이 되니 알아듣는다 치고 사람 간에 할 수 있는 온갖 대화를 개에게 전하며 답변도 하지 않는 개와 공감대를 형성한다. 최근 서울시는 반려견 테마파크 5곳을 건립한다며 화려한 청사진을 공개했다.

그 돈이면 초고령사회에 접어든 어르신들 직업훈련소나 청소년들을 위한 교양 시설을 더 지을 수 있지만 개를 아끼고 위하는 유권자들이 증가하는 한 어느 쪽이 더 정치인들에게 유리할지는 말하나 마나다. 필자도 초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항상 개와 함께 지냈지만 처음 강아지 때와 노견이 되어 사망할 때까지 과정을 보면 많은 추억을 남긴다.

이 과정에서 귀여울 때만 좋고 아프거나 눈감을 때는 다르다. 좋을 때만 반려견이고 힘들 때나 불편할 때는 애물단지가 되면 그때도 마음이 같을까. 사람도 마찬가지다. 처음 만나 설레는 마음으로 데이트할 때는 호감 가는 면만 보이다가 연애 끝에 결혼하고 살다 보면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서로 다른 점을 이해하고 참았던 과거와는 달리 여성이 성경험에 대한 이력을 자랑삼아 말하고 문제 삼는 남성이 사회성이 뒤떨어지는 형국이다.

수틀리면 언제든 이혼할 수 있고 한 집 건너 이혼이 유행처럼 되다 보니 안 하는 사람만 보수적이고 구태에 젖은 사람처럼 여겨진다. 개도 사람도 초심을 잃지 않고 산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은 게 현실이다. 오늘은 반려견을 키우는 분들이 처음에는 예쁘다고 입양해서 온갖 정성을 들이다 노견이 되거나 기타 질병, 사고로 사망하게 되면 그 때는 어쩔 것인지에 대해 잠시 고민해 보자. 현재 전국에서 운영되는 동물 장례식장은 약 70곳에 이른다.

물론 사람보다 턱없이 부족하지만 키우던 반려견이 죽은 다음에도 돈을 들여 장례식까지 치르는 견주들이 얼마나 될까. 그나마 장례식을 치르지 않는다면 어떤 식으로 처리할까. 대충 몸무게가 가벼운 소형견은 종량제 쓰레기봉투에 담아 버리고 그것도 심리적으로 불편하면 가까운 야산에 묻기도 하는데 이 자체가 불법이며 너도나도 다 이런 식의 매장을 하다보면 주변의 야산과 공원이 온통 무덤과 묘비도 없는 동물 공동묘지로 변하게 될 것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다. 평소 가족처럼 아끼던 동물이면 마지막 가는 길도 어느 정도는 유종의 미를 남기는 것이 맞지 않을까. 사람처럼 온갖 요란을 떨지는 못하더라도 이제는 동물의 사후처리 과정이 대충 덮어버리는 사각지대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저렴하고 위생적이며 처리 과정 또한 투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아니 시급하다. 어차피 죽음은 피할 수 없지만 사후 처리에 대해 뾰족한 대안이 없는 현실을 고려할 때 사체들에 대한 잉여물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함께 동거해 온 견주들 입장에서는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다.

살아생전 온갖 요란을 떠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후처리에 비윤리적이거나 견주들 스스로가 심리적으로 괴롭다면 장례시설뿐만 아니라 장례절차와 기본적인 추모방식도 마련되어야 한다.

개나 사람이나 살아생전 서로 호감이나 유대관계에 대한 여지가 있었다면 사망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는 병행되어야 맞는 것이다. 수요는 1,300만 가구가 개를 키우고 있고 1곳에 1마리라 치더라도 공급은 70곳이다. 산술적으로 1곳당 20만 마리를 소각해야 한다. 나머지는 불법이고 견주들은 범죄자가 되는 것이며 이를 알고도 방치하는 것은 개고기 먹지 말자는 소리만 할 게 아니라 동물 학대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