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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암칼럼] 역사는 흐른다, 제주 4·3사건
[덕암칼럼] 역사는 흐른다, 제주 4·3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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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역사를 거슬러 보면 시대를 잘못 만나 온갖 고생은 물론 귀한 생명까지 파리 목숨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조선왕조 오백 년을 돌아봐도 세종과 정조처럼 성군이 덕정을 펼쳐 백성들이 태평성대를 누린 시절도 있었지만 간신 나라 충신들의 아첨과 충신 나라 간신들의 간언으로 인해 고혈을 짜내어 임금과 권세가들의 기름진 배를 채운 시절이 더 많았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어떤 임금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자국의 국민들을 척결하는가 하면 비록 총칼은 아니더라도 돈으로 흉년을 만들고 정작 국민들만 지옥 같은 날들을 보낸 적도 많았다.

백성들이 피폐한 삶을 사는 동안 권력층은 배를 두들기는 근대와 현대사의 이력을 찾아보노라면 휘몰아치는 광풍에 죄 없는 살육전이 한두 건이었던가. 최근에는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그랬지만 대표적으로 1951년 거창양민학살사건이 그랬고 그 이전에는 1948년 전라남도 여수·순천 사건이 그랬다.

이같은 사건들의 한결같은 공통점은 권력 유지를 위한 이념의 갈등에서 희생된 죄 없는 국민들이 죽어서도 말을 못 하는 과거사에 대한 이력이다. 같은 시기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난 민중항쟁으로 3만 명이나 되는 제주 양민들이 무차별 학살된 사건이 제주 4·3사건이다.

사건 발생 35년이 지나도록 빨갱이라는 오명을 쓰고 가족까지 연좌제에 걸려 짹소리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나마 60년이 지나서야 진상조사와 피해자 파악이 실시됐다. 물론 76년이 지난 2024년에도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을까. 아니 없다는 보장이 있을까. 역사적 소용돌이는 현대라고 없으란 법이 없다. 지금처럼 남과 북이 대치 중인 상황에서 좌파·우파, 진보·보수로 나뉘어 대한민국이 둘로 갈라진 상태에서 언제 어떤 식의 동일한 사건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역사다.

앞서 거론한 사건들이 벌어지기 전에 희생된 국민들은 그런 참담한 일을 당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미 고인이 된 희생자들과 살아남았더라도 혹독한 과거를 지난 유족들의 아픔은 그 어떤 보상으로도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에서 비행장 건설 등 강제 노동에 시달리다 식민지에서 겨우 벗어나 이제 살만하다 싶었던 시점에 다시 제주로 귀향한 6만 명이 더해지자 인구 급증에 가뭄까지 겹쳐 실업난은 물론 생필품 부족으로 민심까지 흉흉했다.

때마침 콜레라가 번져 수백 명이 사망했고 일제에 빌붙어 친일을 했던 사람들이 미군들 군정에 다시 줄을 서니 제주도민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는 노릇이다. 모든 발단은 광복 이후 1947년 3·1절 기념식에서 말을 탄 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밟혔고 이를 방치하자 시위군중들이 경찰에게 돌을 던지고 경찰서까지 쫓아간 일이다.

문제는 경찰이 이를 습격 사건으로 오인해 시위대에게 총을 발사했고 이 사건으로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 사건에 대해 남로당 제주도당이 조직적으로 경찰에 대항하면서 제주 전체에 총파업 사태가 발생했다.

직장인의 95%가 동참하고 1,667개 기관, 단체가 함께한 파업에서 미군정은 주모자 검거 작전에 나섰으며 한 달 만에 500명을 체포, 1년 동안 2,500명을 구속했다. 이 과정에서 구금된 양민들이 온갖 고문과 폭력에 시달렸으며 심지어 사망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사태는 본격적로 대립 양상을 띠었다. 요즘으로 비교하자면 좌파 성향의 청년들이 조직적으로 봉기를 일으켰고 경찰 측의 피해도 급격히 늘어났다. 때마침 선거가 있었지만 선관위가 공격당하고 선거는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

다시 재선거를 하려니 이 또한 여의찮았고 양 측간의 대립은 극을 향해 타협이 없었다. 이승만 정부는 제주에 비상계엄령을 내렸고 강력한 진압을 시도했지만 여수에 주둔 중이던 국방경비대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또 수천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곳곳에 피바람이 불던 시기. 제주를 진압하려던 경찰과 반공주의 서북청년단으로 편성된 9연대가 본격적인 칼을 빼 들었다. 낮에는 경찰로 구성된 토벌군에게 게릴라 부대를 협조 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했고 밤에는 무장봉기한 남로당에게 당하는 제주 양민들은 전체 제주 인구 26만 명이 모두 피해 대상이었다.

토벌군은 주민들을 상대로 대량 학살 계획을 세웠고 가옥은 불탔으며 사소한 트집만 잡혀도 재판도 없는 총살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가족 중 한 사람이 없으면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죽였고 한꺼번에 400명을 집단 사살하는 이른바 북촌 사건도 자행했다.

이 사건은 무장대가 군인과 교전 중에 군인 2명이 사망하자 북촌 초등학교에 집결시킨 후 집단 총살한 사건이다. 전체 피해자 중 약 85%는 토벌군에 의해 사망했다는 보고서가 있지만 이 또한 정확한 내용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제주 전체가 지옥이었던 시절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졌고 6·25 전쟁 중에 예비 검속이라 하여 1,120명이 집단으로 수장되거나 총살됐다. 이렇게 제주 4·3사건은 1947년부터 1954년까지 7년 7개월 동안 비극의 땅이 되어 수많은 인명피해가 났고 1960년 경에야 진상규명의 목소리가 국회에서 터져 나왔다.

하지만 역사는 유족들을 외면했다. 5·16 군사정권의 출범 이후 다시 함구령이 내려지면서 이의를 제기했던 자들이나 유족들은 두 번 당하는 아픔을 겪게 됐다. 실제 희생자는 3만 명이라 하지만 4·3위원회가 17년 동안 파악한 바로는 14,233명에 그쳤다.

이념과 사상의 자유가 권력에 희생된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국제 관광도시 제주. 화려한 홍보사진과 영상이 제주공항과 관공서에 아름다운 섬 풍경만 걸려있을 뿐 아직도 미제로 남아있는 4·3사건의 진정한 진상조사와 보상은 머나 먼 역사적 숙제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