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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암칼럼] 신문의 현주소
[덕암칼럼] 신문의 현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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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신문(新聞)의 한자를 한글로 풀이하면 ‘새로운 들음’이란 뜻이다. 날마다 발행하는 일간신문, 그날 일을 모아 만드는 석간신문, 매주 발행하는 주간신문도 있고 취재구역이나 발행부수, 지면의 면수, 지면의 크기에 따라 대판, 타블로이드(tabloid)등 판형도 다르다.

작게는 지자체를 범위로 취재, 발행하는 지역신문부터 특정 구역을 정해 발행하는 광역 신문, 광역시나 도를 범위로 하는 지방신문, 중앙정부를 중심으로 정부부처의 분야별로 전문성을 갖고 취재, 보도하는 중앙지까지 다양하다.

이외에도 학생, 교인 등 특정인을 대상으로 발행하는 학보나 주보도 있지만 신문이 현대사회에서 대중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빠른 속도로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그 이유는 SNS의 발달도 있겠지만 이미 취재과정에서 편집, 인쇄, 배달, 독자들 손에 쥐여져 읽혀지기까지 몇 단계 과정을 거치는 동안 빛과 같은 속도로 더 다양하고 획기적인 소식을 스마트폰에서 접할 수 있으니 정보 취득면에서는 신문이 온라인을 따라갈 수 없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신문의 변호를 하자면 이러하다. 일단 온라인은 정보 면에서 검증과 법률적 책임이 불가하다. 노출은 자유이고 보는 사람의 선택도 자유다. 하지만 태산 같은 정보 중에 노출의 한계가 있는 지면에 압축하다 보니 신중하게 알짜배기만 모아서 보도해야 하는데 여기서 신문의 가치가 결정된다.

통상 신문은 인터넷, 방송, 라디오 등 언론매체중 하나면서도 고정된 룰이 있어 정해진 범위 내에서 표현된다. 분야에 대한 섹션, 표현 방법에 대한 장르, 가장 기본적인 기사 분량과 사진배치 등 편집에도 독자들의 구독환경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정보 취득의 한계가 있는 것이고 과거처럼 원고지에 글을 쓰고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인화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랐던 것이다. 지금이야 그런 수고가 모두 해소됐지만 필자가 기자생활을 시작하던 1990년대만 해도 PC나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었다.

다시 말해 지금의 문명의 혜택을 가장 많이 보는 것이 기자나 글로 먹고사는 사람들에게 더없는 호조건인 것이다. 문제는 편리함이 나태와 안일함으로 변질되면서 조건이 아무리 좋아져도 이를 활용하지 못하고 보도자료에 의존하다 보니 점차 창작이나 현장을 발로 뛰는 취재진의 노력이 감소된다.

사실 보도자료는 홍보를 원하는 기관과 단체에서 스스로를 알리기 위해 단점은 빼고 장점만 공개하는 관계로 당연히 진실보다 현실을 중시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보도자료를 조금 수정해 교정을 거치자면 내용이 다르겠지만 이런 수고조차 하지 않으니 오타까지도 그대로 베껴 쓰는 수준으로 전락했다.

보도자료 100건보다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듣고 작성하는 개발기사 1건이 더 정확하고 올바른 신문의 길이며 개발기사 10건보다 기자 자신의 취재과정을 담은 기자수첩이나 칼럼이 훨씬 정확하고 간단명료하다.

기고는 기자의 소신과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보다 정확히 담고 있다. 현실적으로 신문은 기사가 난 당사자, 지자체의 공보실 관계자, 단체장에게 보고하는 브리핑 자료 정도로 그친다.

신문사의 재정은 근본적으로 신문구독료나 광고비로 충당해야 한다. 그게 어려우니 각종 행사나 지자체 주관하는 축제 등에 신문사 제호를 걸고 예산만 빼 먹다 시민단체들에게 고발당하거나 비난의 대상이 된다.

여기서 문제는 요즘 누가 돈 주고 신문 보냐는 말과 신문광고 내면 무슨 효과가 있냐는 말에 감히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신문사가 얼마나 될까. 말 그대로라면 신문사는 계속 적자가 나야 하고 이를 못 견디면 폐간을 해야 하는 것이 절차이다.

당연히 신문사를 운영하는 사주입장에서는 분명한 철학과 공익을 추구하는 각오가 되어야 가능하다. 필자 또한 신문사의 사주로서 직접 기사를 쓰고 배달도 해보고 온갖 노력을 다해 보았지만 발행하는 입장과 신문을 보는 입장의 차이는 다르다.

얼마 전 중앙일간신문에 대해 발행부수를 조사해 공표한 바 있다. 광고주 입장에서는 사기 당한 기분이었을 것이고 중앙지의 민낯은 여실히 드러났다. 이제 신문의 가치나 영향력은 빠른 속도로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그렇다면 신문이 사라질까. 없어도 되는 것일까. 독립신문이 발행된 이래 100년이 넘는 신문의 역사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지만 국민들의 신뢰나 협조가 없는 한 재활을 꿈꾸기도 어렵다.

신문사는 재정적 어려움으로 하나 둘씩 폐간하고 있다. 만약 현 사회에 신문이 없다면 어떤 상황이 찾아올까. 일단 공직자나 세금을 모아 예산편성을 하고 국책사업을 벌이는가 하면 지역구 발전을 위해 예산 따먹기 전쟁이 벌어져도 이를 시정하라고 야단치거나 잘못 되었다고 지적하는 언론의 선발대가 사라진다.

당연히 소금이 없으면 생선이 썩듯이 부패할 수밖에 없고 그 폐단의 피해는 국민들에게 돌아간다. 그렇기에 독자인 국민과 신문이 함께 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후죽순 격으로 난립하는 신문사에 대한 검증도 필요하지만 사명감으로 종사하는 신문에 대한 관심과 협력도 필요하다.

지난 7일은 ‘제68회 신문의 날’이었다. 신문발행에 종사하는 발행인, 편집인, 취재기자, 사진기자, 편집기자, 인쇄소, 인쇄소에서 지역으로 배송하는 종사자, 배송된 신문을 지역마다 배포하는 배포종사원, 그리고 최종적으로 신문을 받아보는 독자가 있어야 하는데 이중 한 가지라도 빠지면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 신문이다.

이제부터는 모두가 함께 만드는 신문이 되어야 그나마 사회의 부패가 줄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