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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암칼럼] 현대판 전봉준은 어디에
[덕암칼럼] 현대판 전봉준은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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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대한민국호가 겉만 멀쩡하지 속 빈 강정이 된지 오래다. 모든 분야들이 다 각자의 역할을 잘하는데 유독 정치권만이 입으로 민생을 외치며 연일 정쟁을 일삼다 보니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모름지기 사회를 구성하는 최상위층인 정치가 법을 정하고 이를 행정부에서 적용해 나라 살림을 하는 것이니 가장 중요한 분야임에는 틀림없다.

그런 만큼 모범을 보이고 여야가 협치해 난국의 위기를 넘겨야 하는데 현실이 어디 그러하던가. 과거를 돌아보면 나라 살림이 엉망일 때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난을 일으켰다.

요즘 말로 집회 시위가 난무하다 선을 넘으면 내란으로 번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과거에는 산 입에 거미줄 칠 정도로 굶주렸으니 민란을 일으켰지만 지금은 밥이라도 먹으니 굳이 누구 하나 앞장서서 정치권을 비판하거나 바로잡을 엄두도 못 내는 것이다.

2019년 2월 19일 문화체육관광부는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는 국가기념일을 지정했다. 날짜는 5월 11일로 외세의 침략과 부패한 봉건 제도에 항거해 궐기한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재조명하고 애국애족정신을 고양하기 위해 2019년 제정된 것이다.

기념일의 기준은 동학농민군이 전북 정읍 황토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날인 5월 11일로 정했다. 문화체육관광부 주관으로 동학농민혁명 기념식이 개최되며 동학농민혁명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가 진행된다.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다. 따라서 오늘은 동학혁명에 대한 원인과 과정,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왜 이 날을 기념하고 미래의 삶에 참고 해야 하는지 짚어보자. 먼저 원인을 보면 어이없는 이유가 숨어있다.

가장 먼저 시기적으로 보면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 일이다. 1894년 동학 세력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민란으로 부패한 관료들에 대한 민중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 시초다. 당시 가난한 농민들은 조선 말기 세도정치와 탐관오리들의 수탈에 엄청나게 시달리고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새로운 세상을 향한 백성들의 바람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사회적 분위기로 볼 때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기에 더더욱 중요한 날이다. 그래서인가 2023년 5월 18일 동학 농민 혁명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지배층의 폭정에 항거해 나랏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보국안민을 내세우며 시작된 것인데 이미 1893년 충청북도 보은 출신의 어윤중이 선무사로 파견되어서 말려야 했던 집회였다.

당시 전라도 정읍시장 격인 고부 군수 조병갑이 만석보라는 대형 저수지를 축조해 이에 사용료를 부과하고 아비의 공덕비를 세우겠다며 양민들로부터 엄청난 조세와 잡세를 걷고 강제적으로 노역을 부여하는 등 폭정을 일삼았다.

멀쩡한 백성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재산을 빼앗았고 전봉준의 아버지인 전창혁을 대표로 삼아 탄원서를 제출하는 백성을 곤장으로 다스리다 죽게 하는 등 행패가 극심했다. 분노한 그의 아들 전봉준은 봉기를 계획한 사발통문이 1968년 발견된 바 있다.

1894년 음력 1월 10일 밤 12시 전봉준은 1천 여명의 군민들을 모아 관아를 습격해 만석보를 파괴하고, 감옥을 부수어 그곳에 갇힌 죄수들과 동학교도들을 비롯한 농민들과 마을 사람들을 모두 풀어 준 것이 혁명의 출발이었다.

도마 안중근 의사도 동학군 진압에 참여한 적이 있다. 초기 관군이 무너지고 전주성 함락 소식에 고종은 자국군의 역량을 믿지 못하고 청나라에 동학군을 진압할 군대를 파병해달라고 요청했다.

공짜가 어디 있을까. 당장의 권력 유지를 위해 외국의 군대를 끌어들여 자국민을 상대로 유혈극이 벌어진 것이다. 이 선택은 후일 청일전쟁과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이어졌다. 일본도 대륙 진출을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을 때였으니 나라를 통째로 갖다 바치는 꼴이 된 것이다.

집안싸움으로 끝낼 일을 앞집 뒷집 사람까지 끌어들인 셈이다. 중국과 일본 측 기록을 보면 파병이 성사된 주범은 고종, 민영준, 원세개(위안스카이) 셋으로 적혀있다. 결국 1894년 5월 5일 아산만에 청군이 상륙하고 다음 날인 5월 6일 일본군이 제물포에 상륙한다.

이렇게 남의 나라에 상륙한 청과 일본군은 온갖 횡포를 부리며 조선의 내정간섭을 밥 먹듯 하다가 다시 철군을 요청하자 청군은 얌전하게 철군을 준비했지만 일본군은 러시아와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중재도 무시하고 청의 철군 요청에 일본군의 도발이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청일 전쟁이고 한번 발을 들인 일본은 집요하게 조선을 야금야금 삼키는 야욕을 벌인 것이다. 1895년 1월 24일 동학 농민군은 후방에서 기습한 관군과 일본군을 막지 못해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같은 해 4월 24일 새벽 2시 녹두장군 전봉준의 교수형이 집행됐다.

모든 재판을 2심으로 한다는 형법 조항이 시행되기 하루 전 때를 기다리지 않고 즉시 처형한 것이었다. 최후의 순간을 맞은 서울 종로구 영풍문고 앞엔 2018년 전봉준 동상이 세워졌다. 이후 일본은 조선을 삼키려는 온갖 술수를 벌이다 친일파에 협력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된 것이며 이후 35년간 조선은 일본의 수탈과 침략의 손바닥 위에 놓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정치의 잘못이 지방 탐관오리들의 배를 채우는데 일조했으며 그로 인한 백성들의 분노가 차고도 넘쳐 일어난 봉기를 외국의 군대까지 끌어들여 해결하려는 권력의 욕심이 낳은 비극이다.

세월이 흘러 광복을 맞이했고 1973년 11월 11일엔 우금치 고개에서 위령탑을 제막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탑에 동학혁명군 위령탑이라고 썼다. 1980년대 들어 황토현 전적지 등 주요 사적지를 정비하는 사업이 대규모로 행해졌고 1992년 동학농민혁명기념 사업회가 세워졌고 1994년 100주년을 기념해 각종 공연, 전시회 등 문화예술 행사들이 열려 주목을 받았다.

오늘날 동학혁명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살만하니 참으라는 것인가. 아니면 아닌 것은 아니라고 주장해 새로운 미래를 향한 현대판 전봉준이 나서야 맞는 것인가. 정치적 욕심이 낳은 복지국가의 오류가 판을 치고 있다.

여자는 아이를 안 낳고 남자는 일을 안 하고 외국 근로자들이 판을 치는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정신적 지도자가 요원한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