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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암칼럼] 진정한 텃세란. 포용하는 것
[덕암칼럼] 진정한 텃세란. 포용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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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텃세, 이른바 기존 집단이 세력을 구축하여 신규 구성원을 괴롭히거나 귀속시킬 목적으로 괴롭히는 일체의 언행을 의미한다. 조선시대에도 있었지만 해방 이후 일본에서 도입된 이지매 문화는 한국판 왕따를 만들어냈고 때에 따라 피해 당사자가 견디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교과서에 적힌 법대로 살다가는 적응하지 못하고 그들만의 문화에 무릎을 꿇어야하는 것이 현실이라면 현재 대한민국 도심은 물론 시골 농촌과 공직사회, 군대, 스포츠계, 문화예술계까지 총망라해 어디 한 곳도 깨끗하다고 내세울 수 없을 만큼  카르텔이 난무한 실정이다.

가령 국가 예산을 빼먹는 기술이나 각종 정부 기금을 타 먹는 방법도 아는 사람만 단골로 타 먹는다. 이른바 '고기도 먹어본 자가 먹는다'했던가. 자신의 돈은 십원하나 아까우면서 정부 예산은 온갖 명분을 다 대고 서류상 전혀 하자 없이 빼서 나눠먹는 공생의 구조는 지천에 난무하다.

다 까발려 보도하자니 또 적을 만드는 것이고 두고 보자니 가관이다. 글밥을 먹은 지 수 십년, 입만 다물고 살아도 편했을 일을 수십 번, 고소당하고 지금도 고등법원에 항소중이다. 오늘은 텃세, 영어로 카르텔에 대해 국민적 공감대가 서는지, 선다면 해결방안은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보기로 한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 4년간 왕따로 괴롭힘을 당하다가 중학교 3학년 다니는 동안 모두 갚아준 경험이 있었다. 괴롭힘은 분노와 복수를 다짐케 하며 수백 번 맞은 기억을 죄다 돌려주었으니 그러한 과정에 또 얼마나 인체의 급소에 대해 연구를 했던가.

동급생까지 착하면 호구되는 척박한 환경은 특정인의 장악력이 낳은 인간관계의 사생아다. 세월이 지나 고등학교 재학시절에는 밴드부를 지원했다가 2년을 맞고 1년을 패봤으니 매에는 장사가 없고 패면 안 되는 일도 없다는 폭력의 장점을 익히게 됐다.

이러한 폭력적 환경은 군 입대를 했을 때 악명 높은 부대로 배치 받아 또 2년을 맞고 1년을 팼으니 대략 줄여도 200번은 맞고 100번은 패본 셈이다. 어디 필자뿐일까. 그 당시에는 이러한 폭력이 그리 낯설지 않은 시대였다.

그러다 이 세상에는 정의만 존재하고 질서와 도덕이 전부인줄 알고 덤볐던 언론의 입문은 더더욱 이상과 현실이 달랐고 이제는 신체적 폭력보다 법률적, 정신적 가해가 장르를 가리지 않고 폭풍처럼 다가왔다.

다행히 시련을 훈련 삼아 여기까지 버티기는 했지만 모든 과정에서 체험한 바로는 진정한 텃세란 자신의 영역이 침범 당할까봐 발톱을 세우고 경계하는 모습이 아닌 부드러운 포용을 통해 스스로 귀속되게 하는 방법이란 점을 깨달았음에도 그만큼 자신이 없었던 게 아닐까 사료된다.

나름 글에 대한 가치관과 철학을 준수한 것이 직필이라는 자신감으로 상대를 가리지 않고 상황을 가리지 않고 써댄 결과 수십 건의 고소고발에 지금도 고등법원에 항소 중이다. 세월이 지나 중장비 운전을 할 때나, 웨딩사업을 할 때, 지금처럼 숙박업을  할때까지 이일저일 가리지 않고 무모하게 덤비며 도전했던 날들이 남긴 결과는 모든 과정에 그들만의 카르텔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남의 얘기를 전하는 게 아니라 직접 체험한 내용을 적시하기에 시정의 여지를 거론하는 것이다. 최근 벌어진 의료대란에 대해서도 필요성을 주장하는 정부와 절대 반대를 외치는 모습이 자칫 밥그릇 싸움 아니냐는 비난을 사고 있다.

이 또한 텃세가 아니고 무엇일까. 자신의 밥그릇을 채우기거나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남이야 어찌 되는 관계치 않는 것은 단순한 텃새가 아니라 사회구조와 질서에 대한 협박이나 진배없는 행동이다.

1983년 윤홍길 작가가 출간한 소설 “완장”을 보면 순진무구하던 농촌의 농부가 어느 날 완장을 차고 텃세를 부리면 기고만장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요즘도 이런 완장들이 판을 친다. 필자가 새로 준비했던 영흥도 섬마을 숙박업소에서 야외음악회를 할때면 소리가 날 때마다 경찰에 신고하는 것을 자랑삼아 떠들고 다니는 행태정도는 코미디에 그친다. 

온 동네를 다니며 없는 민원도 만들어 내고 이를 견디지 못한 주민은 다시 외지로 전출해 가지만 이를 만류하거나 질책할 용기 있는 사람은 전무하다. 본래 이장은 전입 주민에게 친절한 안내와 소개로 안심하고 정착할 수 있는 가이드 역할을 해야함에도 마치 대단한 권력을 착각하는 것이다.

지난 5월 17일과 19일에는 강원도 태백에서 개최되는 2024전국 어울림 생활체육 배드민턴 댄스스포츠 대회를 다녀왔다. 태백시에서 약 1억 원을 예산을 편성하여 전국의 생활체육인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대회였다. 다소 미흡한 점이 발생하자 지역 언론과 방송에서 부족한 부분만 집중 과장하여 마치 전체가 엉망이 된 마냥 보도됐다. 

외지에서 방문한 강원도 인심이 이정도인가 싶을 만큼 고약했지만 같은 대회라도 긍정적으로 보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언론보도는 지적에 대한 대안이 있어야 하고 순기능과 역기능의 양면성이 있음을 먼저 알아야 한다.

대회에 앞서 홍보를 했다거나 부족한 부분보다 잘된 부분을 보도했다면 아마 같은 보도라도 흠집을 내는 기록물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텃세는 부족한 사람이 완장을 차면 나대는 꼴불견의 일종이다.

반면 포용력을 발휘하여 환영의 메시지를 주었다면 더 관대하고 존중받는 모양새가 나오지 않았을까. 어떤 일이든 밉게 보면 안 미운 게 없고 곱게 보면 안 고운 게 없다. 긍정의 힘이란 이런 텃세라 중단되면서 나타날 수 있는 훈훈한 사회의 미래 자화상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