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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암칼럼] 바다는 말이 없다
[덕암칼럼] 바다는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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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세상 모든 이치는 역지사지로 보면 된다. 누가 독자들에게 욕설하고 뒤통수를 때리는가 하면 몸에다 소변을 뿌리고 얼굴을 할퀴는 등 온갖 못된 짓을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손을 잡고 몹시 아프냐며 위로를 건넨다면 무슨 생각이 들까.

바다가 그러하다. 사람이 생각하는 바다, 그리고 바다가 보는 사람, 역지사지로 보면 인간은 바다로부터 온갖 생선과 해초류, 풍부한 수산자원을 얻는 반면 단 한 가지도 바다에 돌려준 적은 없다.

마음껏 유린하다 일 년에 단 하루 5월 31일을 ‘바다의 날’로 정해 인근 해역의 쓰레기 몇 개 줍고는 바다를 사랑하네 어쩌네 하면서 현수막 걸고 사진 찍으며 요란을 떠는가 하면 어떤 기관에서는 정치인들이 장갑을 끼고 집게를 들기만 하고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이런 쇼맨십은 이제 식상할 만큼 우리 사회의 단면이 됐다. 지리적 특성상 대한민국은 삼면이 바다이고 해수면의 온도에 따라 다양한 어종이 밥상위로 올라온다. 물론 지금은 아열대 어종들이 서서히 잡히는 가운데 동해바다의 명태나 오징어는 멸종되다시피 하지만 아직 그 심각성을 모르고 있다.

수입산으로 대체하면 피부에 와 닿는 것이 없을 테고 우리 수산물이 사라지는 점에 대해 단순히 수산자원 고갈이 아니라 환경의 변화를 체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해수면 상승은 지구 전체의 숙제다.

해수 유입을 방지하는 축대를 쌓으면 그만이겠지만 문제는 어느 정도 상승하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승폭이 지속적으로 증가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백 년 주기로 겪어야 할 기후변화를 십 년 단위로 겪고 남극·북극의 해빙 속도 또한 육안으로 관찰될 만큼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지금이야 어찌 넘어가겠지만 이미 탄소 줄이기는 국제적 대세다. 오늘은 바다의 표정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독자들에게 바다는 어떤 모습인가. 간혹 파도가 부서지는 동해바다로 훌쩍 떠나고 싶은 것은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일까.

그렇다면 동해 바다는 스트레스 더미가 산처럼 쌓인 곳이다. 그래서 바다는 말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오느라 애썼다며 들어주고 파도로 답하며 때로는 여명의 눈동자와 석양의 노을로 답한다.

반면 서해바다는 숨을 쉰다. 엄청난 양의 바닷물이 밀물 때 들어왔다가도 썰물 때면 거짓말처럼 광활한 갯벌을 드러낸다. 그냥 드러내는 게 아니라 밀물을 믿고 따라온 어패류, 해초류, 연체류 등 온갖 수산물을 대거 포함해 갯벌에 표출시킨다.

사람들은 이게 웬 떡이냐며 하루 두 번 바지락 호미를 들고 바구니 가득 캐어 밥상 위에 올린다. 그리고 감사는 스스로에게 한다. 캐느라 애먹었다고, 마치 사람이 1분에 수십번의 호흡을 반복하듯 바다는 하루 두 번씩 거대한 호흡을 한다.

그 크기를 보면 지구 전체가 들썩일 만큼 크다. 이렇게 면밀히 알 수 있는 이유는 바다의 호흡을 천 번 이상 지켜봤기 때문이다. 섬마을 인천 영흥도에서 사무실이 있는 서울 영등포까지 80km, 왕복 160km 다른 행사 모두 제치고 꼼짝없이 바다의 변화를 지켜봐야 했던 시간이다.

때로는 여명을 때로는 석양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노라면 어느 누구나 철학자가 되었을 것이다. 같은 바다라도 천 번을 더 바라보면 보는 사람만이 느끼는 특별한 견해가 생긴다. 그래서 바다의 위대하고 어머니 같은 품을 논하는 것이다.

바다는 인간에게 어머니처럼 한없이 주기만 할 뿐 바라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다에 무엇을 해야 할까.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쓰레기 몇 개 줍는다고 바다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바다를 소재로 영화도 만들고 시도 쓰고 소설을 쓴다 해서 바다를 위하는 게 아니다.

그냥 두면 된다. 말 그대로 하자면 일 년에 단 한 번 5월 31일 쓰레기 주우면 나머지는 버려도 된다는 뜻인가. 바다 입장에서 볼 때 가증스러운 생색내기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음식물 해양투기 방지법이 생기고 해양 감시에 대한 국제적 공감대가 생겼다는 사실이다.

이미 지난 일이지만 인간이 바다에게 가장 못된 짓을 한 과거를 돌아보자. 그리고 같은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하지 말아야 한다. 오래전 경기도 시흥시와 안산시, 화성시 경계선을 중심으로 완공된 시화방조제가 있었다.

지금은 MTV구역에 거북섬과 반달섬을 조성해 놓고 부동산 투기가 한창이지만 처음 방조제를 만들었을 때 막힌 시화호에 반월·시화공단의 많은 중금속들이 그대로 버려지던 시절이 있었다.

결과 시화호는 검은색 호수가 되었고 인류가 낳은 재앙이라 했다. 누가 알았을까. 이런 언론플레이로 동양 최대 크기의 거대한 조력발전소가 들어오기 위한 사전 나팔수의 출정 곡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검은 바다는 조력발전소 해수면의 출수·입수로 인해 조금씩 맑아지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검은 폐수를 방조제 밖의 맑은 해수면과 뒤섞기 시작한 것이다. 시화호 스스로 자체 정화는 환경사업소가 있었지만 공급 대비 정화 기능이 턱없이 낮아 기존에도 방조제 바깥에 파이프를 심어 방류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리고 엄청난 양의 중금속은 서해 바다로 조금씩 방류됐다. 필자를 포함한 환경단체가 중금속을 제거 하고 바다의 문을 열자고 외쳤다. 물론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 지금의 세월호 납골당처럼.

당시 기자 생활을 막 시작하던 때라 이를 외부로 알렸지만 모깃소리만 한 독백에 불과했고 그렇게 천적 없는 시화호에는 숭어 떼들이 마구잡이로 포획됐다. 회를 뜨면 기름 냄새가 코를 찔러도 그러려니 하며 먹던 시절.

외부로 보도했다가 서해안은 물론 도심의 횟집까지 난리가 났다. 일부 상인들은 필자를 회뜨겠다면서 협박전화도 했고 밤길이 두려웠다. 당시 일본의 폐광지역에서 발견된 중금속과 비교하며 이따이 아따이 병에 대한 연구 내용도 실었다가 곤욕을 치렀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상인들의 이익이 아니라 절대 다수의 국민 건강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바다의 날은 지난 일처럼 바다를 괴롭히지 않기만 해도 잘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