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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암칼럼] 사라진 것들의 일장일단
[덕암칼럼] 사라진 것들의 일장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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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사람이 살면서 문명이 발달하게 되면서 어떤 식이든 변화는 있게 마련이다.

다만 그 변화가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이라면 환영할 일이지만 엉뚱한 방향으로 발전하거나 지켜져야 할 것들까지 실종된다면 해당 민족의 정신, 역사, 문화, 풍습은 물론 자존감과 자긍심까지 모두 실종될 수도 있다.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버려도 될 것과 지켜야 할 것을 함께 공감해 보고자 한다. 가장 먼저 우리는 옛것이라는 명사를 전제로 지난 것은 모두 구태의연하며 무시해도 된다는 안일함과 함께 일명 ‘꼰대’라는 단어로 모두 묻어버린 과거가 있었다.

격언이나 사자성어 또는 어르신들의 지엄한 훈계는 모두 꼰대들의 소음이다. 반대로 듣도 보도 못한 한글의 복합어나, 멀쩡한 단어를 앞뒤 글자만 따서 줄이거나 영어를  뒤섞어 말하면 유행어가 되고 뭐라도 있어 보인다.

이를 주도하는 것이 여의도 국회가 그러하고 안방극장의 TV가 그러하다. 이러니 국민들이 뭘 보고 배울 것이며 마치 그러한 변질이 당연한 듯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글도 그러하고 말도 그러하다.

말과 글이 반듯하게 정리되고, 사용되고, 기록되고, 전해지지 않는 나라는 미래의 찬란한 문화를 보장할 수 없게 된다. 당장에 거리로 나가 간판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 우리 것을 얼마나 무시하고 살고 있는지.

다음은 위·아래가 없다. 유독 한국은 분쟁이 생기거나 서로 안면을 틀 경우 “너 몇 살이냐”를 내세운다. 그러다 나이가 적으면 흔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라며 나이가 계급인 것처럼 내세우던 적이 있었다.

물론 지금은 그런 구태가 많이 근절되었지만 대한민국은 예로부터 연륜에 대한 존중이 사회 저변에 깔려 있던 나라다. 하지만 기본은 지켜져야 하는데 아이·어른 없이 돈이 전부인 세상이 되다 보니 이를 바로 세울 계층도 없고 전문 분야도 없으며 누구 하나 나서서 말하는 사람이 없다.

이대로라면 10살짜리 어린이가 70살 어르신에게 이름이나 직책을 호명하며 반말해도 전혀 문제 되지 않는 세상이 찾아온다. 필자의 말에 어폐가 있을까.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미래가 온다.

그래도 좋다면야 모르겠지만 아니라면 적어도 아이·어른 정도는 구분하는 것이 최소한의 사람 사는 사회다. 다음은 기력이 없다. 필자가 수십 번도 더 강조했던 말인데 일단 너나 할 것 없이 일에 대한 열정이 없다.

복지라는 명분으로 몇 푼의 돈을 뿌리고 그 돈으로 표를 얻으니 포퓰리즘(Populism) 정책을 발표한 정치인이야 2선, 3선 해 먹겠지만 몇 푼에 길들어 손도 까딱하지 않으려는 수십 만의 청년들과 수백 만의 백수들은 누가 버르장머리를 고칠 것인가.

이미 습관된 게으름을 감히 누가 이래라저래라 할 것이며 그런다고 그 말을 들어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람의 습관이라는 게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지만 누웠던 사람이 다시 일어나기는 각자의 의지가 필요하기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음은 빗나간 인권이다. 사람의 인권. 인간의 권리는 당연히 존중받아야 하지만 이 또한 너무 존중해 상한선이 사라지고, 정황과 무관하게 무조건 존중하고, 떠받들기만 하면 한번 우쭐해진 인간의 본능은 바람에 대한 하한선도 사라진다.

대표적으로 학생인권조례가 낳은 부작용이 그러하고 상명하복에 목숨까지 국가에 맡겨놓은 군인이 그러하다. 어쩌다 국방부가 정치인들의 기조에 휘둘려 멀쩡한 군인들 군기를 모두 빼놓는지 돌이켜 볼 일이다.

필자도 병장으로 전역했지만 군인이 군인정신을 빼면 남는 게 없다. 다음은 옷과 음식이다. 똑같은 젊은 여성이 고운 한복을 입고 경복궁에 서 있는 장면. 그리고 여의도 국회의사당 복도에 정장을 입고 걸어가는 장면.

늦은 밤 찢어진 청바지에 만취된 상태로 유흥가를 휘청대면서 걸어가는 장면이 동시에 보인다면 독자들은 어느 여성과 가까이하고 싶을까. 의상도 마찬가지지만 먹는 음식도 우리의 정체성이나 고귀한 맛을 저 버린 지 오래다.

양념이나 각종 소스로 범벅이 된 서양식 요리가 더 인기를 끄는 것의 이면에는 우리 것에 대한 홀대가 함께 공존한다. 물론 키우는 개, 물고기, 새, 꽃, 심지어 마시는 커피까지 모두 서구 문명으로 도배가 됐다.

혹여 숭늉과 수정과, 식혜를 찾는다는 자체가 이상한 사람이 됐다. 이밖에 음악, 미술, 스포츠도 변했고, 윷놀이는 카드나 노름기구로 대체됐다. 취미활동도 이제는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는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으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주거 문화도 달라졌다.

일단 마당이 없고 이웃이 없고 오직 아파트나 오피스텔 문만 닫으면 옆집에 누가 죽었는지도 모르는 세상이 됐다. 아무런 교류도 없는 이웃이 말이라도 걸면 성가신 것이고 쳐다만 봐도 경계 해야 하며 층간소음으로 사투를 벌이는 경우는 허다하다.

편리하고 안전하고 살기 좋은 주거 문화일까. 이렇게 길든 사회생활 환경에서 무슨 함께 사는 사회, 이웃의 어려움을 헤아리며 약자에게 도움을 주는 사회가 될까. 그나마 지금은 말이라도 하지만 이제 십수 년도 안 돼 남을 돕는다는 자체가 어색하고 말도 안 되는 세상이 찾아올텐데 그때는 어쩔 것인가.

가장 중요한 변화는 남녀 간의 화합이다. 과거에는 무식하게 막차가 끊겼다거나 섬에 놀러갔다가 밀물이 들어와 밤을 새워야 하는 촌극이 성공하던 때가 있었다. 진위를 떠나 그렇게 만나 교제하고 결혼해 현재의 대한민국 주역들이 태어났다.

못 배운 부모들의 한이 배운 자녀를 키웠고 지금은 모든 분야의 주역이 됐다. 문제는 언제부터 국가가 각 개인의 신체적 생리현상과 본능까지 거머쥐고 법의 잣대를 들이댔던가.

근본적인 문제는 그렇게 안 해도 될 짓거리를 하다가 여성들의 표를 얻고 그 표로 또 2선, 3선 해 개인의 출세나 영달은 채웠을지라도 남녀 간의 갈등이 유발되어 지금의 저출산 벼랑 끝에 내몰리게 된 것이다.

돈과 사람의 비중이 점점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이제 돈이면 윤리도 영혼도 문제의식도 없는 세상으로 가는 입장권을 살 수 있다. 과연 맞는 일일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국민들이 제정신을 차려야 맞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