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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암칼럼] 갈 데까지 가보자
[덕암칼럼] 갈 데까지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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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인륜이 패륜으로 가속도를 내고 있다. ‘삼강오륜’이라는 고리타분한 꼰대 외침은 독백의 가치조차 사라진 채 오로지 돈, 힘, 이기심과 오만함이 현대사회의 지배적 요소로 손꼽히고 있는 가운데 그래도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한국사회의 도덕적 기반은 비교적 안정된 편이다.

빈부격차는 전세계 어디를 가나 공존하지만 보이지 않는 무형의 자산, 해당 국가의 정신적 가치관과 질서의식은 다른 어떤 요소보다 국가존립, 종족보존의 필수적인 바탕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작금의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멀쩡해도 세부적인 인간관계는 빠른 속도로 붕괴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대안 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다. 그 예로 억압을 이겨낸 자유, 자유가 빚어낸 방종이 대표적이다.

대한민국은 식민지를 벗어나 겨우 살만하자 동족상잔의 비극이 이어졌고 다시 정신을 겨우 차릴 즈음 군사독재라는 억압이 시작됐다. 물론 군정이 당시의 폐허 속에 경제적 기적을 일으킨 장점도 있지만 인권이 무시되는 필요악은 피할 수 없었다.

민주화를 위한 희생들이 줄지을 때 많은 국민들이 합세했고 그래서 얻은 것이 자유였다. 진보와 보수를 떠나 자유는 급변하는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했고 지금의 찬란한 대한민국을 낳은 것이다.

문제는 검증되지 않은 자유, 우리나라의 정서에 맞도록 고치고 다듬어 도입해야 하는데 물밀 듯 밀려오는 거대한 흐름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특히 정치권에서는 표를 얻는데 급급해 신중한 외래문물 도입의 절차나 신중함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얻은 것이 지금의 난세다. 경제적, 군사적 난세가 아니라 도덕적 난세다. 아니 말세다. 한번 시작된 자유의 물결은 어느날 인권이라는 명분 속에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았던 제자들이 스승을 교사로 보고 걸핏하면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촬영하며 칠대면 쳐보라는 식으로 돌변했다.

교권은 추락했고 다시 수습하려니 이미 한번 풀린 나사가 조아질리 없다. 교권뿐만 아니라 군대에서는 군기가 사라졌고 가정에서는 어른과 아이의 질서, 장유유서가 사라졌다. 부모의 관심이 간섭으로 치부되는가 하면 직장에서는 상사의 지적이 갑질로 둔갑해 상명하복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공직사회에서도 과거처럼 하라면 하는 식의 명령은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됐다. 한번 바뀐 분위기. 달라진 질서의식은 원상복구가 되지 않는다. 물론 어떤 이치든 일장일단은 있기 마련이다.

원칙과 상식이 존중되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하나를 얻는 대신 융통성, 사람간의 공감대, 훈훈한 정은 사라졌다. 모든 게 법대로 해야 하고 언제부턴가 기계가 사람을 밀어내다 보니 인정이 설자리가 사라졌다.

과거 동네 슈퍼에서 돈이 없으면 외상이라는 거래수단이 있었는데 지금은 키오스크 앞에서 카드 결제를 하지 않으면 물 한 병도 마실 수 없는 세상이 됐다. 급변하는 시대변화 중 가장 심각한 예를 들자면 앞서 거론한 인륜이다.

지난 추석명절 가정폭력 신고 건수가 그 심각성을 증명했다. 2020년 874건이던 명절폭력이 2021년에는 913건, 2022년에는 935건, 2023년은 955건으로 꾸준한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는데 올해는 1,073건으로 늘어났다는 점이다.

하루 평균 건수와 휴일을 곱해보면 폭력건수는 더욱 늘어나며 신고 되지 않은 건수까지 포함하면 명절은 차라리 없는 것이 더 낫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폭력 뿐일까. 음식 차리기 어렵다며 갈등이 빚어낸 이혼건수 또한 마찬가지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아버지가 50대 아들을 살해하고 형제간에 멱살잡이는 기본이다. 노부모가 남긴 서푼의 유산으로 고소가 잇따르는가 하면 서로 다른 정치적 이념도 분쟁의 원인이 됐다.

종교적 갈등, 삶의 질에 관한 이해충돌의 분위기도 모처럼 만난 자식들의 교육에 도움 되지 않았다. 서로 우애 있게 인정 넘치는 분위기를 보여줘도 시원찮을 판에 부모세대의 분쟁을 지켜보는 아이들의 눈에는 명절이 그리 달갑지 않을 것이다.

설날과 추석 1년에 두 번 만나는 상봉의 기쁨이 갈등의 전쟁판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물론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명절날 가정폭력이 심해지고 있다는 건 통계를 벗어나 각자의 가치관이 점차 이격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

한번 틀어진 인간관계는 특별한 소통의 기회가 없는 한 다시 복구되기 어렵다. 특히 형제간이나 부모자식간의 갈등은 직장동료나 친구처럼 자주 접할 기회가 있는 게 아니다 보니 화해하거나 원상복구 될 기회가 많지 않아 봉합되기 어렵다.

그래서인가 안면몰수하고 남보다 더 어려운 사이가 되어 분노의 가치마저 실종된 채 단절되고 마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나라에 대한 애국심과 부모에 대한 효심은 자신의 이익과 얼마만큼 맞물려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삶을 꾸려 가는데 있어 별반 도움 되지 않는 한 관심 밖의 분야가 됐다.

나라보다는 자신이 추종하는 정치적 집단, 부모보다는 거래처나 동호인들에 대한 관삼이 더 큰 게 현실이다. 나라의 외형은 멀쩡하고 초고층 아파트나 차종을 구분할 수조차 없는 다양한 교통수단이 화려한 야경 속을 달리지만 정작 그 아파트 문 열고 들어가 보면 도덕과 인륜은 문명의 발달과 병행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이라도 지식보다 지혜를 가르치는 부모가 있어야 하고 성공을 향하는 길목에는 선의의 경쟁 속에 배려가 필수적임을 깨우치는 사회적 가치관이 형성되어야 한다. 적어도 명절 날 친지들의 상봉이 반가움과 기쁨의 장이 되어 자식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안 그래도 저출산으로 친척이라는 단어가 실종될 위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할게 아니라 도덕적기반위에 다시 우리민족의 찬란한 얼과 혼을 찾아봄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