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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암칼럼] 어르신 건강하십시오
[덕암칼럼] 어르신 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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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어르신’을 국어사전에서 검색하면 나이가 많은 사람을 높여서 이르는 말로 적혀있다.

반대로 영감은 나이가 많은 남자를 홀대하면서 부르는 단어다. 또 늙은 여자를 놀리거나 얕잡아 이르는 말로서 할머니의 방언으로 불린다.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도 곱다 했던가. 같은 말이라도 예의를 갖추면 어르신으로부터 얻을 게 많다. 돈이 아니라 삶의 연륜과 경륜에서 쌓은 깊이 있는 노하우는 환산하기 어려운 지적 자산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숫자에 약하다. 사회적으로 노약자라고도 불리는 기준은 무엇일까. 혹여 독자들도 65세 이상이라면 버스나 지하철에서 노약자 좌석을 당당히 앉아갈 나이라고 생각할까. 평균연령이 높아지면서 이제 65세는 중년이라 볼 수 있고 적어도 70세가 넘어야 노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전히 한국 사회는 65라는 숫자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오늘은 1990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제45차 국제연합 총회에서 10월 1일을 ‘노인의 날’로 정한데 이어 한국에서도 1997년 10월 2일부터 법정 기념일로 정한 노인의 날이다. 이날은 정부에서도 유공자 포상 및 100세 어르신 청려장 증정 등 다양한 행사가 진행된다.

먼저 날 때부터 노인은 아니었다. 소년, 청년, 중년, 노년으로 이어지는 생로병사의 굴레는 누구도 벗어나지 못한다. 나이가 들면 체력도 기억력도 흐려지기 마련이고 태어날 때처럼 기저귀를 다시 차야 하며 걸음마 때 사용하던 보행기도 다시 사용해야 한다.

치아가 성치 못해 어릴 때 먹던 미음을 다시 흰죽으로 먹어야 하며 울면서 태어났다가 다시 유족들의 울음을 뒤로하고 멀고 먼 북망산천 길을 누구의 배웅도 없이 홀로 가야 한다. 태어날 때 양손 주먹을 꼭 쥐고 났다가 갈 때는 두 손을 펼쳐 보이며 간다. 마치 뭔가를 잡으려 태어났다가 한 세상 일장춘몽의 파란만장한 시대를 살고 돌아갈 때는 다 놓고 가는 형국이다.

사람의 욕심이란 게 젊을 때는 날고 기며 살지만 나이가 들면 인정하기 싫은 것이고 말로는 죽어야지 하면서도 하루라도 더 버티며 이생의 삶에 집착하게 된다. 운이 좋아 사고나 질병도 없이 늙을 수 있고 2~3일 앓다가 조용히 떠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막상 살아보면 죽어라 일해서 번 돈을 병원비로 쓰고 빈손으로 간다면 다행이다. 치료비에 요양비, 간병비가 모자라면 자식들도 외면하는 것이고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은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흐름을 보면 그나마 지금의 어르신들은 복지혜택도 꼼꼼히 받을 수 있고 일부지만 부모에게 효의 근본을 실천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면허증 반납, 고령 운전의 위험, 정부예산도 쥐꼬리만큼 관련 단체에게 편성하는 것을 보면 점차 노인들의 사회적 지위가 추락할 수밖에 없다. 물론 국민 평균연령도 높아지고 노인들이 늘어나겠지만 경제력 없고 업무의 효율성도 떨어지는 노인들이 갈 곳이 급격히 줄어들 수밖에 없다.

1년에 한 번 돌아오는 ‘노인의 날’. 자장면 대접이나 경로잔치 행사에 시장·군수들이 온갖 폼을 잡고 축사를 해주는 일도 모두 한때다. 이날 하루만 대접하면 나머지 364일은 제쳐놔도 되는 것일까. 평소 노인들을 공경하고 성의껏 대접하는 것이 앞으로 늙어갈 사람들의 도리이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노인들에게 삶의 낙을 찾아드리는 것이다.

물론 나이가 들면 정신력도 단순해져서 아이가 된다고 한다. 식사도 틀니를 끼워야 할 수 있고 피부는 주름져 있으며 70년 이상 묵은 세포들의 냄새가 날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 다가오는 ‘노인의 날’이 과연 지금처럼 잔치라도 마련해 줄까. 필자가 가늠하기에는 천만의 말씀이다.

일단 공경하고 받드는 대상이 너무 많다. 온통 노인들뿐이고 이를 대접하는 젊은이들의 수요가 턱 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굳이 받들어야 할 명분도 가치도 없거니와 대상이 차고도 넘쳐 면허증 반납처럼 남은 삶을 반납해야 할 시대가 찾아온다. 그 뿐인가. 집안에서는 스마트폰 기능을 절반도 모르고 사용하고 나가서는 키오스크 사용법도 잘 몰라 안내 직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언론에서는 노인혐오로 여론을 악화시킬 것이고 정치인들은 젊은 사람들의 표를 구하기 위해 비경제 인구를 대상으로 안락사 신청법을 만들 것이며 이는 국회를 통과해 노인들이 스스로 알아서 저승길을 선택해야 하는 시대가 될 것이다.

살고 싶어도 눈치 보여서 버티지 못하는 현실. 지금처럼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지켜줄 돈도, 의사도, 병실도 모두 부족해 여기저기 홀로 살다가 몇 주쯤 지난 다음 악취로 신고한 이웃 주민으로 인해 겨우 시신이나 수습해서 무연고로 화장되는 시대가 올 것이다. 악담일까. 아니다. 통계와 사회적 변화를 감안할 때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일이다.

대안이 있을까? 물론 있다. 지금처럼 윤리와 도덕이 바닥을 치고 있을 때 인륜의 도리와 장유유서. 즉 어른과 아이는 질서가 있어야 하며 왜 그래야 하는지와 세대 차이를 극복해 상호 존중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문화가 자리 잡아야 한다.

가령 청년 창업도 어르신과 1:1로 묶어 실패의 가능성을 줄여야 하고 육아교실도 열어 출산의 두려움도 할머니들의 노하우를 통해 극복해야 한다. 요리도 배울 수 있고 된장, 고추장 담그는 법도 서로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 기술 장인은 개인별로 쌓은 경험을 전해주어야 하고 차세대들이 미처 알지 못한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도 공감해야 한다.

노인들의 지혜와 정신을 나눌 수 있는 정책을 세운다면 비참한 말로는 훨씬 줄어들 것이다. 헤아려 보면 어르신들이 살면서 겪은 체험담이야말로 인터넷에도 없고, 국어사전에도 없는 우리 민족만의 소중한 경험을 간접적으로 이해하는 통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