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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성칼럼] 林 대사, 毛允淑 詩人 뺨때린 사연
[김운성칼럼] 林 대사, 毛允淑 詩人 뺨때린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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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평론신문 발행인

48년 5월초는 대한민국 탄생(誕生)의 원초 작업이 한창인 때였다.
일주일 후에 치러질 5·10 제헌(制憲)국회 선거의 시점이었다.

UN감시하의 총선거였으니 UN회원국 파견단인 10여명의 선거 감시단이 메논(인도출신) 단장의 인솔 하에 입국하여 조선호텔에서 진을 치고 한창 붐비게 돌아갔었다.

어느 날 밤늦게 건국원훈 이승만의 최측근인 林병직(외무부장관 유엔주재대사 역임) 대사가 메논 단장을 만나려 그의 집무실을 노크하고 기다릴 때, 도어가 열리더니‘렌의 哀歌’로 한국 시단을 풍미한 毛允淑 여류시인이 방을 나와 부딪치자 홍당무가 되었겠다.
하도 수상쩍어 林 대사가 아래위를 훑어보니 머리는 미처 고르지 못한 산발을 하고 아래치마 매무새가 헝클어져 한 자락이 질질 끌렸었다.

林 대사는 직감적으로 ‘사바시바가 있었구나’라는 심리 발작으로 毛 시인에게“이 화냥년아 어디 벌릴 데가 없어서 그 인도(印度)놈이여 정 궁하면 청계천변에 가서 힘센 지게꾼을 택할 것이지” 돌발적으로 수모를 당한 毛 시인은 고개를 떨구고 함구무언이었다.

호텔 보이가 毛 시인을 추슬러 사건은 일단락 지었겠다.(얼론 불발)
한데 林 대사는 감정이 폭발할 그럴만한 이유는 없었다.

해외 망명 중일 때 林 대사는 파일럿이 되어 미국-영국 항공로를 오고 갔었다.
그 때 李 박사는 林 대사에게 지시하기를 런던에 머무는 같은 피압박민족인 인도의 독립 운동가들과 자주 만나 공동전선을 펴라는 특명을 받았었다.

하지만 영국에 머문다는 인도의 독립 운동가들을 만나기는 했지만 신통한 소득이 없었다.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했었다. 독립을 쟁취하려는 성의결여에서 인지 신통치가 않았으니 손을 떼었다.

그러나 2차대전이 끝나자 민족자결주의 부활로 인도는 어엿이 독립 하였다. 패전국에 속했던 우리는 그 인도의 선거 감시를 받는 체제였으니 임 대사는 큰 비애를 느꼈을 때다.

더욱이 인도는 국제적으로 엄정주립을 지킨다 하였으니 이 또한 못마땅하였을 때였다.
그런 위상의 인도출신 메논 단장을 만나러간 사각에 毛시인을 만났으니 비분강개의 협기가 절로 나왔다는 것이 후일담이다.

헌데 이 사건은 바람 따라 이 박사의 귀에 들어가 임 대사는 李 박사 앞에 서서 굴신하게 되었다.

“조선호텔에서 毛 시인 뺨에 두 대를 날렸다지”
“각하 그게 아니고...”
“걷어 치워. 毛 여사는 내가 희생양으로 삼은 걸세 그놈에게 여체를 안겨 스탈린의 세계적화에 물들지 않게 말이야”

필자가 목격한 일은 아니라서 더 깊이는 모르겠지만 중앙정계나 언론계에서는 쉬쉬하면서도 알 사람은 거의 냄새를 맡았었다.

이를 빗대어 毛 여류시인은 논개의 남강투신에 버금한 애국공신이라고 찬사를 던지는 쪽이 많았다.

그런 반면 일부 호사가好事家)들은 모 시인이 안호상 박사와 파혼(破婚) 후 10년 묵은 생과부였으니 6적거구의 메논의 남근(男根)에 얼마나 황홀했을 고 하고들 하면서 두사람의 정열을 지껄였다.

필자는 결례를 무릎 쓰고 만천하에 알리는 것은 그 각본은 지략만능, 외교만능의 李박사의 출중한 각본이었다는 것이다.

김용서 시장이 위인. 기인전을 익혀서 李 박사의 임기응변적인 지혜를 터득했더라면 도하 사태는 거뜬히 미화시켰을 것이다.

김용서 시장이 도하를 떠날 때 그가 보듬은 레슬링 선수는 금메달을 땄었다.
그와 동행해 인천공항에서 수원 출신 선수의 금의환향이란 환영 당시대화를통해 해결점을 찾아야 했다.

여론을 반전시킬 수 있고 비전은 어디가고 왜 공항은 숨어서 빠져나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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