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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적 민주주의
민족적 민주주의
  • 이달순 수원대 명예교수 kmaeil@
  • 승인 2007.11.14 2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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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적 민주주의를 혁명이념으로 내세우고 5.16 쿠데타에 성공한 김종필이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스스로 부장에 취임해 한일회담을 주선하자 대학생들이 서울대학교에서 “제2의 이완용, 김종필 타도와 민족적 민주주의 화형식”을 올렸다. 이 자리를 찾아가 시위하는 학생들에게 조국 근대화 그리고 민족중흥을 위한 그의 목표를 강연하였다. 시위하던 학생들이 그에게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물론 그가 떠나자 시위와 장례식은 계속되었다. 나는 JP를 멋진 분으로 호감을 갖게 된다. 당시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사회주의국가건설을 외치면서 주체사상을 내세우고 있었다. 이에 대한 대항논리로 민족적 민주주의를 주창하면서 반공을 국시로 하고 미국의 지지를 얻어 민주공화당을 창립하는데 성공한다. 1967년 6대 대통령으로 박정희를 재선시키는데 성공한 공화당의장 김종필은 청운각에서 선거 취재하던 기자들과 만찬을 즐기는 자리에 동아일보 석간이 날아들었다. 1면 5단 전면광고에 나온 ‘비원의 번영탑’이란 책 광고가 문제가 되었다. 부제로 김종필의 반생기란 제목이 붙어있고 편저자로 중앙대 정치학강사로 게재되어 있었다. 기자들은 2년 중임제 대통령을 당선시켜 놓고 차기 대통령의 선거운동이 시작된 것이냐고 기자들이 공세를 폈다. JP 반대파들은 박대통령에게 그를 모함하는 계기도 되었다. 나는 검찰에 불려갔다.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죄로 고발되었다고 했다. 나는 당당히 맞섰다. 당의장 보좌관인 김진봉 양정선배가 나를 설득했다. 진명출판사가 동아방송 대담 연재테이프를 가지고 와서 그 자료로 출판했던 것이기에 책을 회수하되 출판사가 손해 보지 않도록 하는 선에서 사건은 매듭지어졌다.김종필은 국무총리에 취임한 후 매주 월요일마다 전국의 화재인물과 출근하면서 커피타임을 가졌다. 임철순 중앙대 총장이 최연소로 취임하여 신문마다 대서특필되며 초청을 받게 되어 나와 함께 총리실로 들어섰다. 나에게 “서라벌예대에 나가 계시죠?”라고 했다. “네 임영신 재단이사장이 예술인 양성을 위해 예대를 인수해 나를 이사장대행으로 직책을 맡기면서 훌륭한 대학으로 키워보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총리께서는 5.16의 이념으로 민족적 민주주의 기치를 높이 드셨습니다. 지난주 취임한 임 총장은 취임사에서 민족적 민주교육을 교육의 이념으로 선포하셨습니다. 두 분은 젊으십니다. 두 분의 이념은 같습니다. 한분은 정계에서 한분은 교육계에서 활약하시면서 두 분이 손잡고 일하시는 계기가 이 자리인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근대화와 민족중흥은 앞당겨 지리라는 기대가 큽니다.”라고 했다. 김종필 총리는 민관식 문교부장관을 전화로 부르라고 했다. 그 날이 민방위훈련이라 중앙청청사 지하실로 대피훈련중이라고 전했다. “수원에 아주대학이 있는데 불란서에서 실습용 공과대학기재를 많이 들여왔는데 중앙대학에서 인수해 공과대학으로 키우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우리는 고맙다고 인사하고 나왔다. 오후에 민관식장관이 김진봉 실장을 통해 “이미 인수자를 결정했으니 양보해 달라”고 나에게 전갈을 해왔다. 나는 그를 대한체육회 대의원총회에서 회장으로 당선시키는 공로자였기에 잘 알고 있었다. 임철순 총장은 며칠 고민하다가 양보하자고 했다. 얼마 못가서 JP는 제거된다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JP의 주변인물들이 사찰대상으로 오르는데 JP가 아주대학을 중앙대로 넘겨준 것이 밝혀지면 아주대학 뿐 아니라 중앙대도 빼앗길 염려가 있다는 주변의 충고가 있다고 했다. 민족적 민주주의도 물거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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