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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재의 문학산책] 한인현의 섬집아기와 민들레꽃
[박상재의 문학산책] 한인현의 섬집아기와 민들레꽃
  • 박상재(한국아동문학인협회 이사장) [email protected]
  • 승인 2023.08.08 18: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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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현(韓寅鉉1921~1968)은 함경남도 원산시 중청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캐나다인 선교사가 세운 광명보통학교를 다녔다. 이 학교는 외국인이 운영하는 사립학교여서 일본 경찰의 감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조선인 교사들은 교실 문을 걸어 닫고 학생들에게 조선 역사를 가르치고 춘원 이광수가 쓴 『단종애사』 등을 읽어 주었다. 그는 선생님이 읽어 주는『단종애사』를 듣고 가슴앓이를 하며 자랐다. 그 시절 한인현은 체육, 음악, 작문, 동극 등 문예체 부문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934년 1월 <어린이>지에 동요시 「아가 아가」, 「겨울바람」을 투고하여 입선되면서 작품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보통학교를 졸업하자 어렸을 때부터 꿈인 교사가 되기 위해 함흥사범학교에 진학했다. 1942년 함흥사범학교를 졸업한 그는 경기도 여주군 가남초등학교 교사로 첫발령을 받았다. 

한인현은 일제 강점기 우리말을 쓰지 못하게 하던 시절 하숙방으로 아이들을 불러 우리글과 동요를 가르쳤다. 이것이 소문이 나 이웃 마을에 있는 마구실교회에서 크리스마스 때 동극을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이를 승낙하고 동극 공연을 위해 어린이들에게 우리말과 우리글을 가르쳤다. 1944년 성탄절을 앞두고 ‘눈내리는 밤’ 동극을 우리말로 발표하다 일본인 순사들에게 들켜 교직에서 쫓겨날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일본인 교장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인현은 1946년 한글날을 맞아 창작동요집 『문들레』(민들레)를 펴냈다. 이 책은 김의환이 삽화를 그리고, 시조시인 가람 이병기가 서문을 썼다. 1947년 12월 그는 동요를 보급하기 위해 윤석중이 주도한 ‘노래 동무회’에 나가 합창지휘 및 지도를 맡았다. 노랫말은 윤석중, 작곡은 윤극영·정순철, 지휘는 한인현, 반주는 김천이 각각 맡아 일요일에 서울 명륜동에 있는 윤석중의 집에 모여 어린이들에게 창작동요를 가르치기로 한 것이다.

한인현은 <소학생>에 「저녁」, 「꿈」, 「사냥군」, 「섬집 아기」, 「강물」 등 5편을 차례로 발표하였다. 이 무렵 <소학생>지에 동요시를 발표한 아동문학가들은 박은종(화목), 이원수, 권태응, 윤석중, 김상옥 등이었다.

한인현은 1954년 1월 한국아동문학회 창립시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그 후 서울종암초등학교, 서울대사범대학부속초등학교 교사를 지내다 은석초등학교 개교 교사로 전출한 후 교감을 거쳐 1965년 제3대 은석초등학교 교장이 되었다. 그는 국정교과서 심의위원으로 일하며, 새싹회 간사를 맡아 윤석중을 돕기도 했다.

한인현은 음악에 재능이 있었다. 아코디언이나 트럼펫 연주도 하고, 작사와 작곡은 물론 합창 지도도 하였다. 스포츠를 좋아해서 스스로 농구와 같은 운동을 즐겼고, 교장이 되어서는 교내 빙상부를 창설하고 전국초등학교 빙상경기연맹 회장이 되었다.  

모든 일에 열정적으로 일하던 그는 한국글짓기지도회 회장으로서 1969년 2월 7일 춘천 공지천에서 열린 빙상대회에 참석 후 오후에는 전남 광주에서 열린 글짓기지도교사 연수에 참석하여 강의를 하다 쓰러졌다. 전남대학교 부속병원에서 치료하다 2월 14일 새벽에 타계했다. 그는 경기도 광릉 가족묘지에서 영면하다, 2020년 4월 분당 메모리얼파크로 이장되어 부인과 함께 잠들어 있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남아 집을 보다가
파도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아기는 혼자 남아 집을 보지만/ 갈매기 울음 소리 맘이 설레어/
다 못 찬 굴 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옵니다.

                                      
국민동요가 된 「섬집 아기」는 1946년 발간된 동시집 『민들레』에 수록되었다. 그 후 1950년 <소학생> 4월호에 재수록 되었다. 7·5조의 음수율을 지닌 이 작품은 중학교 선배인 이흥렬이 곡을 붙여 한 때 우리 국민이 좋아하는 애창 동요 1위(1992. 1. 19. 경향신문 ‘新 名曲을 찾아서’ 기사)가 되기도 하였다.

한인현은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래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늘 가슴에 안고 살았다. 그는 여름이면 해당화가 한창인 명사십리 바닷가에서 깜둥이가 되도록 뛰어놀았다고 회고
한다. 그는 그리움의 대상인 어머니와 고향 명사십리의 모래밭을 생각하며 이 동요시를 창작했다. 

아기를 돌볼 사람이 없는 엄마는 잠이 든 아기를 두고 섬그늘에 굴을 따러 간다. 하지만 엄마는 아기가 걱정되어 굴바구니를 채우지 못하고 돌아온 것이다. ‘다 못 찬’ 굴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모랫길을 달려오는 엄마의 모습은 엄마의 사랑을 갈구해 온 시인이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투영시켜 창조해 낸 엄마의 모습인 것이다. 「섬집 아기」는 모성애를 바탕으로 한 정서적 안정과 심리적 만족감을 안겨 주는 까닭에 온 국민이 세대를 뛰어넘어 애창하는 국민동요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민, 민들레는/꽃 중에도 장사 꽃/큰 바위에 눌려서도/
봄바람만 불어오면/그 밑에서 피고 지는/꽃 중에도 장사 꽃//
민, 민들레는/꽃 중에도 장사꽃/가고 오는 사람들이/
밟고 밟고 또 밟아도/길가에서 피고 피는/꽃 중에도 장사 꽃//
민, 민들레는/꽃 중에도 장사꽃/나물 캐는 아가씨가/
뜯고 뜯고 뜯어가도/뿌리에서 다시 피는/꽃 중에도 장사 꽃

                                   
 「민들레」는 「섬집아기」와 더불어 한인현의 대표작이다. 민들레는 금잠초(金簪草, 금비녀)라고도 하며 앉은뱅이라는 별명도 있다. 민들레는 겨울에 꽃줄기와 잎이 죽지만 이듬해 다시 살아나는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어 이것이 마치 밟아도 다시 꿋꿋하게 일어나는 백성과 같다 하여 민초(民草)로 비유되기도 한다. 

한인현은 민들레의 이와 같은 특징을 살려 ‘꽃 중에도 장사꽃’이라고 노래하였다. 큰 바위에 억눌려도,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도, 뜯고 뜯어가도 꿋꿋하게 다시 피는 꽃이 민들레인 것이다. 민들레는 솜털씨앗이 있어 바람을 타고 씨앗을 널리 퍼뜨릴 수 있다. 그가 교장으로 있던 은석초등학교 교정에 있던 민들레 씨앗들이 그의 고향 원산 갈마반도까지 날아가 꽃을 피웠는지도 모른다. 원산 앞바다에 있는 작은 섬까지 날아가 섬집 아기에게 희망의 봄소식을 전해주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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