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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상] 정승, 대제학 가문의 영욕
[단 상] 정승, 대제학 가문의 영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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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국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정승은 정1품. 대제학(大提學)은 정2품 벼슬이지만 정승판서가 부러워하는 고귀한 직책이다. 이 직책은 본인이 물러나지 않는 한 종신토록 재임 할 수 있었다.
‘열 정승이 대제학 하나만 못하다’ 라는 말이 있듯이 조선 5백년을 통틀어 부자가 대제학을 지낸 일은 일곱 번이고 3대까지 이어진 대제학은 네 번에 불과하다.
지금의 국립 서울대학교 총장 격이니 대단한 자리다.
필자는 얼마 전 고향친우인 이효승의 초청으로 가평 상면에 있는 그의 11대조인 월사(月沙)이정귀(李廷龜)의 연안이씨 3대 대제학 사당과 전각을 탐방했다.
월사 이정귀는 판서 정승과 대제학을 지낸 최고 관료이며 아들 백주 명한과 함께 명 시인으로 유명하다.
월사는 백사 이항복, 송강 정철 그리고 필자의 12대조인 설봉(雪峯) 박몽서(1551-1634)와 서해 유성용, 시승 남구만 등과 자주 만나 시를 읊고 교유 했다한다.
월사가문이 융성하기 시작한 것은 중시조 이무(李茂)의 6대손 이광과 7대손 이종무(대마도 정벌)장군부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세를 풍미하던 월사의 명가문도 영욕이 교차, 병자호란과 함께 역풍을 맞는다.
슬픈 사연을 간추려보면, 월사공이 1635년 가을에 병사하자 아들 명한은 상중임에도 모친 안동권씨와 아우 소한과 가솔들을 이끌고 청군을 피하여 강화도로 피난했다.
그러나 강화까지 청나라군이 들어와 체포 등 살육을 감행함에 소한의 아내 여주이씨는 납치 및 겁탈을 피해 1636년 1월 23일 꽃다운 나이 20세에 스스로 자결하였으며 이틀 뒤인 1월 25일엔 일상의 부인인 명한의 며느리 전주 이씨도 자결하였다.
또다시 이틀 뒤엔 명한의 둘째아들 가상이 청군을 피할 길이 없자 우물에 빠져 자결하였으며 가상의 두 아우 만상과 단상은 청군에 끌려갔다가 인조반정으로 방면됐지만 가상이 자결한지 불과 12일후인 2월 10일엔 월사가의 대부인이며 월사공의 부인인 안동권씨 마저 굶어 사망한다.
환란기를 지나 가문은 다시 융성, 월사의 증손자 이휘조(해주목사)와 5대손 정승 종복과 6대손 복원의 대제학을 비롯 10대손까지만도 고시 급제자만 89명이나 되니 명문대가의 면모를 지켰다 할 것이다.
다음 명문사가로는 안동 김씨인데 청음 김상헌, 김상용 대에 이르러 가문이 번창일로를 걷는다. 김상용은 승지가 되고 1617년 인목대비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원주로 귀양까지 갔다온 후 복권되어 인조반정후인 1632년에는 정승까지 올랐다.
김상헌도 중시장원 승지로써 1613년 인목대비의 부친 김제남이 사사당할 때 그와 인척이라는 이유로 파직됐다가 효종이 즉위하매 다시 등용됐으나 모진 고통의 여진 속에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한다.
이렇게 명문대가의 찬란한 영화 속엔 비참한 액운도 꼭 수반됐었으니 권력과 영욕의 무상함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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