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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암 칼럼] 음악이 없었다면
[덕암 칼럼] 음악이 없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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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매일 회장 김균식

숲속에 머물러 눈을 감으면 자연의 합창이 들린다. 풀벌레, 산새, 시냇물은 물론 봄이면 싹이 돋는 소리와 가을이면 낙엽이 땅바닥에 닿는 소리, 겨울이면 함박눈이 쌓인 눈이 사그락거리며 내려앉는 소리도 들린다.

이런 자연의 소리를 인간은 감히 흉내 내지 못하지만 인간은 목에서 나는 음성 말고도 다양한 기구나 선, 금속으로 소리 나는 악기를 만들어 화음을 이루는 연주를 한다.

물론 연주를 배경으로 노래하는 자연적 발성은 국경, 인종, 종교를 넘어 모든 분야에서 각기 다른 기능과 역할을 하며 때로는 집단을 이끄는 훌륭한 도구로도 사용된다. 군대의 군악대가 그러하고 종교의 찬양대, 성가대가 그러하며 학생들의 정서적 인성을 갖추는데도 사용된다.

세분화된 음악은 도표, 음표, 오선위에 각종 표시를 통해 전 세계가 공통적인 장르를 구상하는 계기로 발전했다. 나열하자면 한도 끝도 없는 음악의 세계, 오늘은 1982년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된 세계적인 음악의 날로써 매년 6월 21일을 기념으로 세계 120여 개국, 700개 도시에서 다양한 콘서트와 음악행사가 열린다.

개최국인 프랑스에서는 1000만 명의 연주 500만 명의 음악가 및 가수와 18,000회 이상의 콘서트가 열린다고 하지만 전 세계가 축제로 열리는 이날 한국은 비교적 조용한 편이다. 이유야 알 수 없지만 음악이 세계 공통어인 것 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한국의 음악은 이미 K-POP 등을 통해 전 세계 한류문화로 강타하는 위력을 보이고 있지만 대중성에서는 참여도가 턱 없이 부족하고 주로 관객이 되는 수준이다. 오늘은 기념일에 맞는 한국음악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해보자.

한국음악은 6.25 전쟁 전후로 1차 장르의 경계가 생겨났다. 먹고 살기 어려웠던 전후 세대들의 아픔과 폐허 속에 다시 일어서려는 의지, 그리고 분단된 이산가족들의 애타는 그리움과 한 맺힌 사연들이 주를 이뤘다, 그러다 보니 빠르고 경쾌한 리듬보다는 구구절절 애절한 분위기가 공감대를 형성했다.

이후 근대화에 들어서서는 개척, 협동, 희망과 같은 경쾌한 리듬이 등장하면서 서서히 사랑과 이별을 노래하는 개인감정의 사연들이 자연스럽게 노랫말의 대부분을 지배했다. 대부분의 가사라 남녀 간의 연애를 소재로 했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당시 군사독재시절 대중성을 갖춘 음악에서 사소한 대목이라도 군중심리를 자극시키는 가사 말이 있으면 여지없이 금지곡이 됐다. 금지곡은 민중가요의 리듬에 민주화를 상기시키는 내용이면 이른 바 단속의 대상이 되었지만 이 또한 정치적 군사독재가 종식되면서 다시 한국음악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됐다.

1980년부터 강변가요제가 낳은 대학가의 가요선풍은 20년간 지속됐다. 당시 빛을 본 가수들이 이후에도 대형가수로 자리 잡으며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당시 20년간 이어진 한국음악은 동요, 민요, 대중가요, 성악, 뮤지컬, 마당놀이는 물론 품바타령까지 국민들의 애환을 달래는 흥겨운 장단이었다.

때로 라디오를 통해 별이 빛나는 밤에 라는 프로그램은 많은 청소년들의 추억공장이 되었고 너도나도 엽서를 보내며 신청곡을 듣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동네 다방마다 레코드LP판으로 음악을 틀어주던 DJ가 등장 새로운 음악의 대중화를 선도하는 역할도 맡았다.

대한민국 음악은 지난 70년간 국민들과 함께 했다. 힘들 땐 술 마시고 소리치는 탈출구가 되었고 기쁠 땐 장구치고 징과 꽹과리를 두들기며 신명하는 놀이마당이 됐다. 만나서 사랑하면 행복해서 부르고 듣고, 이별하면 모든 가사내용이 자신의 이별을 노래하는 것처럼 들려 함께 울고 슬퍼할 수 있었다.

우리민족은 흥을 타고난 DNA를 갖추고 있다 그러다 보니 듣는 것만으로는 만족 못해 부르는 쪽으로 취미 삼았다가 아마추어 가수로 진출하는 경우도 많았다. 인기가수로 성공 못해도 적게는 수년, 많게는 수십 년을 무명가수로 생활하며 밤무대를 다니는 사람들도 많았고 일반 국민들도 노래방을 다니며 목청껏 소리치는 일상이 비일비재했다.

오죽하면 전국노래자랑이 장수 프로그램으로 인기를 누렸을까. 하지만 2020년 찾아온 코로나 19는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공연문화를 통째로 바꾸었다. 거리두기로 제한됐던 공연문화는 TV 방송국으로 국민적 관심을 모을 수 있었고 그렇게 탄탄대로를 걸었던 미스 트롯과 가요프로그램들은 호황기를 맞이했다.

안방극장의 위력은 참으로 대단했다. 화려한 영상, 집집마다 벽걸이로 자리 잡은 초대형 화면, 스마트폰의 활용 등으로 한국의 음악은 거대한 소용돌이를 맞이했다. 수십 년 쌓은 가왕들의 철옹성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무명가수들의 진출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하는 기형적인 가수들의 피라미드가 형성됐다.

숲속에는 모든 생물들의 다양한 숨소리가 들려야 한다. 대형 맹수들 몇 종류만 살 수 있는 곳이라면 얼마가지 않아 아름다운 화음을 들을 수 없다. 코로나 19때 가장 피해가 많았던 분야는 문화, 예술, 스포츠였다. 물론 경제 분야도 서리를 맞았지만 공연의 3대 요소인 무대, 관객, 배우에서 관객이 없었던 3년은 모든 배우들에게 암흑 같은 시기였다.

어렵사리 음대 졸업해서 외국 유학까지 마친 성악가나 오케스트라, 연주단은 물론 조명, 음향기기, 연출자들 모두 숟가락을 내려놓고 대리운전까지 나서야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이어졌다. 필자 또한 트럼본을 3년간 연주하며 합주의 맛을 느껴본바 음악을 하던 연주자는 그 맛을 잊기 어렵다는 점을 충분히 공감한다.

이제는 고퀄리티를 내세우며 개별적인 장르를 고집하는 시대도 지났다. 때를 같이하여 많은 음악인들이 공격적 연주를 지향하고 있다. 다행스런 일이다. 이제 뮤직 마케팅은 찾아가는 다리품과 관객이 원하는 메뉴를 제공해야 하는 시대에 도래했다. 이제 관객은 배우들의 열정에 버금가는 매너로 무대의 객석을 메워야 한다.

이미 대한민국 국민의 절반은 가수다. 집집마다 학원을 다녔는지 모르는 노래가 없다. 필자도 약 1,000곡은 부르니 그 정성이면 좋은 대학 가고도 남았을 것이다. 함께 즐기고 흥을 나누는 사회 그래야 살만한 사회, 신명나는 대한민국이 될 것이다. 음악은 침묵을 깨고 열정을 부르는 에너지를 담고 있다.